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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먹고, 코딩하고, 사랑하라
    개발/그 외 2025. 3. 30. 20:52

    회사에서 일을 시작한 지 어느새 7개월 차가 되었다. 그동안 나는 회사에 모니터링 시스템을 구축하거나, 구식 시스템을 유지보수 가능한 현대적인 구조로 바꾸는 프로젝트를 맡아왔다.

     

    내가 속한 조직은 전형적인 개발 조직과는 거리가 있었다. 개발 업무가 필요했지만, 이를 전담하거나 체계적으로 운영할 개발팀은 없었다. 시스템을 개선하거나 업무 효율을 높이기 위한 개발은 최소한으로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런 환경 속에서, 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점점 욕심이 생겼다. 처음엔 주어진 일만 해도 충분했다. 그러나 시스템을 들여다볼수록 눈에 보였다. 느렸지만 모두가 불편을 감수하고 사용하던 시스템, 고장 나지 않으면 굳이 손대지 않던 구조들. 누군가는 '원래 그런 것'이라며 넘기던 것들이 내 눈에는 고쳐야 할 문제로 보였다. '내가 조금 더 손을 보면, 모두가 편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은 자연스럽게 내 업무의 범위를 넓혀갔다.

     

    그렇게 나는 회사 iMac에 원격 시스템을 구축해 놓고, 퇴근 후 집에서도 작업을 이어갔다. 주말과 평일의 구분은 의미가 없었다. 하루 대부분을 코드와 로그를 분석하며 보냈다. 일이 곧 삶이 되었고, 매일이 작업이었다.

     

    그 과정은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웠다. 엉켜 있던 버그를 해결하고, 불필요하게 느렸던 응답 속도를 눈에 띄게 개선했을 때, 내가 만든 변화가 숫자로 드러나는 순간은 짜릿했다. 몇 초씩 걸리던 화면이 빠르게 떠오르고, 시스템이 눈에 띄게 가벼워질 때마다 내가 만든 변화가 실제로 세상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을 위해 매일 밤 모니터 앞에 앉는 일이 당연해졌다. 목표한 바를 이루는 성취감이 있었고, 기대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과정 자체가 내 삶의 동력이 되었다.

     

    그렇게 몇 달, 내 일상은 점점 일로만 채워지고 있었다. 주변 동료들은 퇴근 후 운동을 하거나, 저녁 약속을 잡거나, 새로운 취미를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원격으로 회사 시스템에 접속해 있었다. 누군가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라고 물으면, 그건 내 선택이라고 대답했다. 일하는 시간이 곧 내 성장의 시간이라고 믿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자친구와의 대화에서 문득 멈춰 서게 됐다. 대화 도중, 그녀가 자신의 삼촌 이야기를 꺼냈다. 삼촌은 업계 경력이 오래된 시니어 개발자였다. 오랜 시간 동안 높은 업무 강도에 시달리며, 일과 삶의 경계가 거의 사라진 채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최근의 내 모습을 보며 삼촌과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퇴근 후에도 일을 놓지 못하고, 주말에도 시스템을 들여다보며 시간을 보내는 내 모습이 그와 겹쳐 보였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나 역시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관계는 정보 전달 수준으로 단순해졌고, 중요한 순간들을 '잠깐만'이라는 말로 미뤄왔다. 회사 안에서도, 집에서도, 나는 늘 '이거 하나만 더'라는 생각으로 일에 모든 시간을 쏟고 있었다. 개인의 성장을 우선시하는 과정에서, 일 외의 요소들은 자연스럽게 배제되어 있었다.

     

    여자친구와의 대화를 통해서 내 삶의 균형이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지만, 그걸 인정한다고 해서 당장 뭔가를 바꾸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의 나는 여전히 일에 몰두해 있고 싶었다. 일을 줄이면 성장도 멈출 것 같았고, 잠시 손을 놓는 사이에 무언가 중요한 것을 놓칠까 불안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두려워했던 것은 성장의 멈춤이 아니었다. 어쩌면, 일을 내려놓았을 때 남는 내 삶이 어떤 모습일지 마주하는 게 두려웠던 것 같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그 답을 잘 모르겠다. 여전히 나는 일을 좋아하고, 여전히 일에 몰두해 살아가고 있다.

     

    그렇지만, 그런 대화를 계기로 마음 한편에서 '이대로 계속 가도 괜찮은 걸까?' 하는 질문이 떠올랐다. 그 질문은 금세 결심으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그때 처음으로 내가 멈춰도 괜찮을지 고민할 여지가 생겼다

    그렇게 나는 몇 가지 작은 시도를 해보기로 했다. 단순히 내 삶의 균형을 위해서라기보다, 그동안 내가 미뤄왔던 주변 사람들을 위해서였다. 특히 내 곁에서 오랫동안 기다려준 여자친구를 위해서라도, 내가 조금은 달라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업무 시간이 끝나면 노트북을 닫고, 퇴근 후에는 의식적으로 코드를 열지 않으려 했다. 친구와의 약속을 미루지 않고, 여자친구와의 대화에 조금 더 집중하려 했다. 주말마다 켜두던 원격 접속 프로그램도 한 번쯤 꺼두기로 했다. 내가 놓치고 있었던 것들을 다시 돌아보고 싶었다.

     

    물론, 쉽지 않았다. 일을 하지 않는 시간에도 '지금 이 시간에 코드를 보면 더 나아질 텐데'라는 생각이 습관처럼 떠올랐다. 일을 줄인다고 해서 마음까지 금방 여유로워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조금씩, 나를 둘러싼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나를 기다려주는 관계들, 그리고 내 삶의 다른 영역들.

     

    무엇보다도, 일을 잠시 내려놓는다는 게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여전히 마음 한편에는 불안이 남아 있었다.

    내가 코드를 보지 않는 동안 무언가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남들보다 뒤처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 이틀 더디게 성장한다고 해서 나라는 사람이 바뀌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그 불안을 안고서라도, 삶의 다른 부분들을 조금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그런 불안과 작은 시도들을 거치며, 나는 점점 생각하게 됐다. 일과 삶, 둘 중 하나를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 균형이 어렵고, 때로는 어느 한쪽으로 기울기도 하지만, 그래도 둘 다 소중하다는 걸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개발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끊임없이 무언가를 쫓는 일인지도 모른다. 더 나은 코드를 짜고, 더 효율적인 구조를 고민하며, 매일 성장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우리는 쉽게 다른 것들을 뒤로 미루곤 한다.

    나 역시 그랬다. 좋은 개발자가 되기 위해 좋아하는 일을 더 잘하기 위해, 내 시간과 에너지를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그 과정에서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그리고 내 삶의 다른 측면들을 얼마나 미뤄두고 있었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여전히 정답을 찾지 못했다. 일과 삶의 균형을 완벽하게 맞추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그런 정답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만, 이제는 안다. 일을 사랑하는 것과 삶을 사랑하는 것은 반드시 충돌할 필요는 없다는 것. 좋은 코딩은 좋은 삶에서 나온다는 것.
    그리고 그 삶 안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소중한 관계들, 그리고 나 자신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오늘도 나는 고민한다. 어떻게 하면 일도, 삶도, 사랑도 놓치지 않을 수 있을지. 그리고 이 고민의 과정 자체가, 내 삶을 조금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주리라 믿는다.

     

    먹고, 코딩하고, 사랑하라.

    셋 모두가 내 삶에 오래 머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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